제 2회 SF 국제 예술축제에서 공연하는 이애주 교수
87년 6월, 군사독제의 불만이 고조되던 당시, 이애주 교수는 민주화의 열풍 앞에 자신을 내던졌다. 이른바 ‘바람맞이 춤’공연…, 이어 이한열 군의 추모식장에서 추었던 ‘한풀이춤’은 ‘해방춤’이란 이름으로 방방곡곡에 휘돌아쳤다. 이애주의 춤사위 하나하나는 항거의 몸짓 그 자체였다. 춤이 있는 곳에 그녀가 있었고, 그녀가 있는 곳에 군중이 있었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이애주 교수는 온몸의 뼈마디와 피가 섞여 춤이 된다고 소감을 대신했다. 그녀의 스승 한영숙의 지론이었자, 이애주 자신의 한을 대변하는 소리였다.
이애주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춤을 잘추어 주위에 소문났던 이애주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어머니 함숙영 씨가 국립국악원에 데려갔고, 여기서 전통 춤의 대가 김보남을 만나게 된다.
김보남 선생과의 만남으로 춤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한 이 교수는 69년 서울대 체육교육학과에 재학 중 벽사 한영숙과 만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벽사는 한 눈에 그녀를 알아보았고, 한영숙으로부터 75년 중요무형문화제 제 27호 승무의 이수자가 되고, 96년 급기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87년 이 시대의 풀무에 몸을 맡긴 지 만 십년만의 일이었다.
이애주의 춤은 일부 평론가들이 독화살을 날리기도 한다. 한국 춤이 아니라는 것이다. 춤이 아닌 ‘해프닝’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독화살은 대수로운게 아니었다. 이애주의 춤, 그 저리에 민주화에 대한 사랑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애주는 그 누구보다 엄격한 춤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춤과 함께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해왔다. 그러나 시대적 부름 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인간을 위한 예술’, 시대가 요청하는 불길 속에 과감히 몸을 던져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 춤꾼 이애주가 아닌 우리시대의 저항인으로써 세상의 풀무에 몸을 달구고, 두들겨 맞으며 삶이란 무엇인가를…, 춤이 무엇인가를 몸소 깨우쳐 나갔다. ‘바람맞이 춤’… 그 단근질의 일생이었다.
이애주 교수는 18일 김희경 교수의 창작 승무 ‘제전 III’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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